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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Competence 너+나=우리

소통, 언어와 주체를 넘어 확장되는 예술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갤러리 박영의 첫 국제교류전 형식으로 열린 이번 전시의 주제 는 문화의 존재의미가 소통임을 말해준다. 너와 나의 개별적 존재를 넘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문화적 역량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가하면 문화가 고스란히 투사된 예술은 자기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언어의 한 형식이다. 그 형식은 상징과 기호, 신화와 원형 등 다른 문화적 지층에 속한 것이지만, 대개는 정서에 직접 호소하는 과정과 방법을 통해서 그 차이를 넘어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이해에 이르게 한다(예술은 정서적 언어다).
그러니까 이 주제는 소통론과 관련하여 예술과 문화의 가장 본질적인 지점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이 주제는 타자론을 아우른다. 너와 내가 서로 소통한다는 것은 주체의 경계를 허물어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행위를 전제한 것이며, 상호영향사와 상호관계성에 대한 인식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시에 참여한 총 6명의 작가들은 그 국적이나 현재의 활동 배경이 각기 다른데, 이런 점이 오히려 예술의 본질(언어의 차이를 넘어 공감하게 하는)과 타자에 대한 인식(주체의 경계를 넘어 소통에 이르게 하는)을 더 잘 드러내주고 있다.

루마니아 태생의 조각가 아리엘 모스코비치(Ariel Moscovici)는 <점과 점 사이>, <머리>, 그리고 <섬> 연작을 출품했다. <점과 점 사이> 연작에서 점과 점은 극과 극, 처음과 끝, 생과 사를 의미한다. 점과 점 사이를 이어주는 선이 무한하듯 점에서 점으로, 시점에서 종점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가는 과정과 경로 또한 무한하다. 그 과정에서 어떤 길이 다른 길들에 비해 더 결정적이거나 더 중요하지 않다. 모든 길이 다 결정적이고 중요하다. 길은 많지만, 그 길 하나하나가 일회적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점과 점 사이를 이어주는 선이 무한하듯 삶과 죽음 사이에는 무한한 의미들이 잠재돼 있다. 그리고 그 무한한 의미들 가운데 어떤 의미를 취할 것인가는 각 존재들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을 주어진 조건으로보다는 성취해야할 과정으로 보는 실존주의적 인간관과 통한다. 이로써 작가는 삶의 다양성과 이질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한편, 무한한 삶의 의미들 가운데 어떤 의미와 더불어 살 것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뇌의 유기적인 형태를 기하학적인 형태로 환원해놓은 듯한 <머리> 연작에서 작가는 신의 관념을 형상화한다. 융기된 모듈(단위원소)이 집적된 형상을 통해 태초에 신이 머릿속에 그렸음직한 세계의 상을 재현한 것이다. 그 상은 플라톤이 세계의 원형으로 간주한 이데아를 상기시키고, 혼돈 가운데 세계가 조형되는 태초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가하면 유기적인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큐브 형태가 집들이 어우러진 건축적인 풍경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 건축적인 풍경은 고대문명의 발굴된 터의 이미지와 함께 고고학적 상상력을 자아내는 <섬> 연작에서도 확인된다. 이 반원형의 섬들은 사람들이 저마다 머릿속에 그리고 있음직한 이상향을 상징하며, 외계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면서 고립시키는 존재의 이중성을 암시한다.

프랑스 태생의 실비 리빌론(Sylvie Rivillon)의 조각은 재현적이기보다는 추상적이다. 소재인 단단한 오석과 대리석의 고유한 물성을 강조하는 한편, 최소한의 구조만을 오롯하게 형상화함으로써 조각의 본질(이를테면 양감과 물성 같은)에 천착한 모더니즘 서사를 연상케 한다.
그 이면에는 타자성에 대한 주제의식이 놓여있다. 상호간 이질적인 형식과 요소를 서로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수평과 수직구조를 대비시키고, 유기적인 곡선과 기하학적인 직선을 대비시키고, 광택 마감한 부분과 돌의 표면질감이 그대로 드러난 거친 부분을 대비시킨다. 이로써 추상적인 구조와 함께 조각의 본성이 강화돼 보이는가 하면, 설핏 일종의 풍경조각으로 범주화할 만한 한 지점이 암시된다. 수직의 구조가 기념비적인 인상을 불러일으키며(이를테면 토템폴이나 오벨리스크와 같은), 중첩된 곡선이 능선이나 파도를 연상시킨다. 추상과 재현을 넘나들고 물성과 일루전을 아우르는 형태가 극적 긴장감과 함께 서정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스페인 출신 작가 라몬 로이그(Ramon Roig)의 회화 <알레프>(Aleph) 시리즈는 소설 속의 모티브를 차용하고 각색한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이 갖고 있는 세상을 반영하는 구슬에서 작가는 세상의 구석구석을 보고 듣고 여행하게 해주는 인터넷 시대의 문화적 풍속도와의 유사성을 발견한 것이다. 또한 몸과 의식을 분리해서, 의식을 멀리 떠나보내는 일종의 사유의 유목을 실현시켜주는 것이란 점에서 인터넷은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삶을 파노라마처럼 전개해 보여주는 주술사의 수정공과도 유사한 점이 있다. 그 주술적 상황이 현대적 문맥 속으로 옮겨온 것이며, 개인적인 층위에서의 경험이 사회학적인 맥락으로 확대 재생산된 경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취해진 소재가 공인만큼 작가의 그림은 평면 위에 원형이 중첩되고, 그 원형의 표면에 사물, 세계, 대상이 반영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단백질 세포의 결정체 이미지나 꽃잎의 단면 이미지 등 생물학과 물리학에서 취해온 소재들이 반영되고 있는데, 사실상 삶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를테면 민속학이나 사회학적인 맥락에서 취해온)이면 무엇이든지 소재로서 차용될 수 있다. 이때 작가는 대상 그대로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일정하게 양식화하고 기호화한다. 더욱이 공에 비친 영상이 그런 것처럼 길게 왜곡되고 좌우대칭이 강조돼 보이는 대상은 재현적이기보다는 추상적인 패턴처럼 보인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작가는 일종의 렌즈 내지는 변형 모니터랄 수 있는 공의 표면에 비친 반영상(反影像)을 통해 삶의 풍경을 만화경처럼 펼쳐 보이는 것이다.

독일 작가 틸만 크리그(Tilmann Krieg)는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그 사진들은 상식적인 사진과는 사뭇 다르다. 사람들의 전면 대신에 뒷면을 포착하기 일쑤고, 그 마저도 초점이 나간 것처럼 흐릿하고 상(像) 또한 겹쳐 보인다. 노출 시간을 조절한 것인데, 노출 시간이 길어지면 움직이는 상들이 겹쳐 보이고, 더 길어지면 모든 움직이는 것들은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이처럼 최소한의 흔적만을 남기거나, 아예 사라지기조차하는 피사체는 전통적인 사진의 미덕인 현존성과 지시성(인덱스)과는 다른 층위에 속한다. 흔들릴 수 없는 사실에 대한 신뢰, 그 증거와 증명과는 다른 지점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흡사 피사체들을 거대한 흐름 속에 녹여낸 것 같은 그의 사진들은 사진보다는 회화처럼 보이며, 특유의 분위기와 함께 서정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인상은 작가가 소재로 차용하고 있는 메트로 즉 지하철의 역동적인 모습과도 어울린다. 지하철은 현대인의 일상과 정체성을 엿보게 하는 대표적인 아이콘이다. 현대인은 항상 어딘가로 이동 중에 있으며, 그 분주한 일상 속에서 정체성을 상실한 채 익명적 주체로서 거듭난다. 사람들의 뒷모습은 이러한 익명적 주체를 암시하며, 빛과 어둠이 적절히 직조된 지하철의 정경은 그 익명적 주체들을 보듬는 도시의 자궁 같다. 이로써 작가의 사진들은 움직이는 존재, 흐르는 존재, 흔적으로 남은 존재, 그리고 마침내는 사라지고 마는 존재에 대한 덧없음을 상기시킨다.

재독작가 정영창(Chung Yongchang)의 작업실은 물류창고와 이웃해 있다. 어느 날 창고에 쌓인 쌀부대를 적재하다가 실수로 쌀알이 부대 밖으로 흘러내려 바닥에 쌓이는 정경을 목격한 것이 쌀 작업의 계기가 되었다. 이후, 작가는 쌀을 소재로 해서, 이를 페인팅, 사진(출력물) 그리고 설치작업 등으로 다양하게 풀어낸 다.
설치작업에서의 바닥에 깔린 쌀 한 톨 한 톨은 그대로 세계의 모나드(최소단위원소)며, 소우주며, 존재의 씨알에 해당한다. 그 씨알들이 모여 세계를 만들고 우주를 형성시킨다. 그 씨알들이 다름 아닌 쌀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생태론과 통한다. 쌀만큼이나 생명사상을 뒷받침하는 메타포가 또 있을까. 쌀은 또한 식량을 의미하며, 따라서 머잖아 도래할(어쩌면 이미 시작됐을지도 모를) 종자전쟁과 식량전쟁이라는 사회학적 맥락과 만난다. 실제로 종자전쟁과 식량전쟁은 문화산업과 지식산업(이를테면 온갖 형태의 로열티와 지적 저작권) 이후 가장 강력한 신종 전쟁의 아이템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로써 바닥에 깔린 쌀 한가운데에 부유하는 낡은 배 한 척이 노쇠한 역사를 연상시키며, 특히 보트피플(Boat People)을 암시한다. 삶의 전형으로서 낭만적인 정조마저 불러일으키던 일엽편주와 보트피플은 이렇듯 그 의미하는 바가 멀다.
작가의 쌀 작업은 이처럼 존재론적이고(존재의 씨알) 사회학적이다(식량전쟁). 그리고 서정적이다. 그 정서가 설치작업보다는 페인팅과 사진작업에서 더 두드러져 보이는데, 칠흑 같은 화면 위의 쌀 한 톨이 막막한 우주를 저 홀로 떠도는 존재 같고, 그 고독한 존재를 위로하는 유성 같고, 어둠을 밝히는 달빛 같다.

이현미(H.M Du Rhone)는 현재 호주에 채류하고 있는 작가로서, 현지에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박영갤러리와 함께 이번 전시를 유치하는데 실질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전시에 작가는 추상적인 화면과 구상적인 화면을 중첩시켜 자연 이미지를 형상화한 일련의 그림들을 출품했다. 추상적인 화면은 색면 구성으로서, 이질적이면서도 서로 통하는 세 지층이 하나의 화면 속에 녹아들어 있다. 먼저, 색면 구성은 모더니즘적 환원을 실현한 몬드리안의 회화적 유산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한국의 전통적인 색동문양과 함께 미디어의 출력물 이미지(이를테면 색상 띠로 나타난 모니터의 초기화면과 픽셀 이미지를 변주한 것 같은)를 연상시킨다. 동서양의 미술사적 유산과 함께 동시대의 이미지의 존재방식(미디어를 통해 해석된 이미지)을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색면 구성은 무엇보다도 자연의 색감과 질감, 자연의 이미지를 추상적으로 환원한 것이며, 그 위에 자연의 구상적 이미지를 중첩시킨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이 직조된 화면이 감각적 표면을 넘어 자연의 본질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지점 즉 자연성을 예시해준다.